작년에 이어 올해도 깊어가는 가을에 정릉을 찾았네요. 달라진 점은 작년에는 혼자 왔었는데 올해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가을을 즐기기 위한 자리였기에 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작년에 방문했을때 해설사분의 설명을 들으면서 둘러보고 블로그 포스팅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글 남기지 않으려고 했다가 해설사님의 설명 중에 정릉의 석물들이 청계천 복원공사에 사용되면서 광통교 다리에 흔적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릉과 광통교를 같이 소개하는 글을 남기면 재미있을 것 같아 포스팅해 보려고 합니다.
▷ 정릉의 가을
11월 9일(토) 방문 했을때의 정릉 모습입니다. 아직은 햇살의 따뜻함이 남아 있고 나뭇잎은 단풍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1시경 들어왔기 때문에 해설사 안내 시간인 2시 까지는 1시간가량 남아있어 먼저 정릉숲길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네요.
정릉 숲길은 2개 코스로 이뤄져 있는데 저희는 조금긴 팥배나무 숲길(1.44Km)로 한 바퀴 돌고 오니 정문 근처 안내판 옆에 해설사 분이 해설준비 하고 계셔서 함께 했네요.
[해설 시간]
- 매주 화 ~ 금 : 1월 ~ 12월 (10시 / 14시)
- 매주 토 ~ 일 : 3월 ~ 12월 (10시 / 14시) <=능침 해설
조선왕릉중에 몇 개의 릉에만 능침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정릉은 해설사분과 함께하면 능침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능침 위에 올라가면 1396년 만들어진 혼유석과 장명등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특히 장명등은 고려시대 조각의 특징을 물려받은 탑이라고 하네요.
자 이제부터 해설사님을 통해 들은 정릉의 역사적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 볼까 합니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2번째 부인이자 조선 최초의 왕비(첫번째 부인은 조선 건국전 사망)인 신덕왕후 강 씨로 태조가 사랑한 왕비였다고 하네요. 그래서 사망 후 궁궐가 가까운 현재의 정동에 릉을 만들어 자주 찾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방언에 의해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이때 신덕왕후와 이방언의 사이가 틀어졌다고 합니다.
이방언이 조선의 3대 왕인 태종으로 오른후 평소 마음에 들지 않은 정릉을 한양밖 지금의 자리로으로 옮기면서 처음 릉이 있던 곳이 정릉이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정릉동에서 정동으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네요.
그리고 옮겨진 릉은 묘로 격하 시킨후 관리하지 않다가 260년이 지난 1669년 송시열의 건의로 다시 릉을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1409년 릉이 옮겨질 때 많은 석물들을 옮기지 못하고 남겨 두었는데 그때 남겨진 석물을 이후 청계천 범람으로 다리 건설할 때 자재로 사용되었다고 하네요.
해설사님이 보여준 광통교에 있는 정릉의 석물 사진 실물을 보기 위해 직접 청계천을 다녀 왔습니다.
▷ 청계천 광통교 - 정릉의 석물
현재 광통교는 청계천 광장에서 2번째 있는 다리로 청계천 복원공사로 만들어진 다리 22개중에 조선시대 사용된 자재를 최대한 많이 활용해서 만든 다리인 것 같습니다. 청계천을 자주 다니면서 오래된 돌들을 많이 사용한 다리인 것 같다는 생각만 했는데 이렇게 정릉과 연결이 되는 장소라는 것은 정릉 해설사님을 통해 알게 된 내용이네요.
광통교 다리 교각을 보면 위와같은 글씨가 보이는데 정릉과 관련된 글인가 하고 찾아보니 정릉과는 관련 없는 청계천 바닥을 깊이 파낸 시기를 표시한 글이라고 하네요.
- 庚辰地平(경진지평) : 영조 36년(1760년)
- 癸巳更濬(계사경준) : 순조 33년(1833년)
- 己巳大濬(기사대준) : 고종 5년 (1869년)
정릉이 1396년 만들어 졌는데, 모를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제 알고 나니 이곳에 있는 돌들과 조각은 600년이 넘은 석물들인데 이렇게 방치(?) 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최소한 유리 같은 것으로 보호하고 간단한 설명을 곁들인 안내판들이 있다면 청계천의 볼거리 중 하나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네요. 언제 관련기관에 건의라도 해 봐야겠어요.
서로 떨어진 2개 이상의 장소가 이렇게 연관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니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한 역사여행이었습니다.